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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 해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경의 가르침과 개혁주의신학을 계승하여, 사변화된 신학을 반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 생명을 회복하고자 하는 신앙운동이다.

그리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실현함으로써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를 위해 나눔운동과 기도운동과 성령운동을 통해 자신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실천을 도모한다.

학교법인 백석학원 설립자 장종현 목사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은 일곱 가지의 실천운동들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실천운동들은 영적 생명력이 약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의 신학교와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제 각 실천운동들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임을 믿고, 개혁주의신학을 계승하려는 신앙운동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어떤 새로운 신학이 아닙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역사적인 개혁주의신학을 바로 계승하여 생명력 있게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란 어떤 것인지, 개혁주의신학이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실천을 위해서는 어떤 일들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인 성경

우리가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훌륭한 책이라 해도 다만 사람의 책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은 오직 성경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성경을 쓰신 후 그것을 땅 위로 던져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도 결국 어떤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어떻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까?

그 답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성경을 기록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썼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신 후 ‘자, 이제 내가 너를 통해 성경을 기록할 생각이다.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도록 하여라’라고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사람을 무아지경 속에 들어가게 하신 후 그가 자기도 모르게 어떤 글을 썼는데 나중에 읽어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되게 하신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책을 쓰시려고 할 경우 먼저 어떤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가운데서 글을 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아를 전혀 잃어버리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분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의 신자들을 칭찬해 주고 싶으실 때는 어떤 사도의 마음속에 그 사람들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을 가득하게 해 주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을 책망하고 싶으실 때는 어떤 선지자의 마음속에 분노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또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 한 상태에서 글을 쓰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쓰는 글에 조금도 오류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간섭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된 글이 탄생하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글들을 모은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비록 사람들의 손을 통해 쓰여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책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신 다음에는 우리에게 전혀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도 하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때로는 여러 방법을 통해, 이를테면 꿈이나 환상, 혹은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합니다. 즉 그런 것들은 성경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내용이 성경과 충돌하는 것이라면 그가 들은 말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개혁주의신학의 핵심

성경의 내용은 무척 방대하기 때문에 그 핵심적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항목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것을 신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러 신학들 중에서도 ‘개혁주의신학’을 가장 훌륭한 것으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다섯 가지 표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표어들의 뜻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오직 성경: 우리의 신앙과 삶의 표준은 오직 성경밖에 없다.
  • 오직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 오직 믿음: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오직 은혜: 구원을 위한 우리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 오직 하나님께 영광: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런 개혁주의신학을 따르는 교회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부릅니다. ‘개혁교회’라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개혁된’ 교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교회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것과는 다르게 많이 부패하고 그 모습이 뒤틀려졌었는데 그것을 ‘개혁하여’ 바로잡은 교회가 바로 개혁교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개혁된 교회라고 해서 늘 좋은 상태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패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고 그렇기 때문에 늘 부패하고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번 개혁했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 되고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개혁주의신학자들은 이것을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늘 자신을 되돌아보며 깨끗하고 건전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도 개혁하지 못하는 교회가 다른 사람 혹은 사회를 향해 올바르게 살라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 근거한 신앙운동 실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개혁주의신학을 올바로 계승하여 힘있게 실천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즉 역사적 개혁주의신학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서 오늘 이 땅에서 성령의 역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하자는 신앙운동입니다. 개혁주의신학은 성경을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신학을 받아들이고 계승한다는 것은 성경을 대단히 소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을 바꾸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가치관과 세계관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굴복시켜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결하고 의롭게 살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또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법에 따라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 법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경의 내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몇 구절을 놓고 자세히 연구해 가며 읽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성경 전체를 여러 번 통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여러 번 읽으면 아직 그 자세한 내용은 이해하지 못 한다 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알게 됩니다. 개별적인 구절들을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성경 통독을 장려하기 위해 성경읽기 대회, 성경암송대회, 성경퀴즈대회, 성경필사 등의 행사를 마련하여야 할 것입니다. 과거 한국교회가 큰 부흥을 일으켰을 때는 이런 행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성경을 중심으로 한 이런 프로그램들을 많이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 교회, 국가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 후손들이 계속 복을 받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강조함으로써 이 땅위에서 성령의 역사가 힘있게 나타나게 되기를 사모하는 신앙운동입니다.

  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지나치게 사변화된 신학을 반성하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신학은 학문이 아님’을 강조하여 그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코자 하는 신학회복운동이다.

현대에 있어서 신학은 지나치게 사변화된 경향이 있습니다. 즉 삶의 현실, 교회의 상황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신학에 영적 생명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신학의 자리를 바로 찾아주어 그 생명력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신학회복운동입니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의 역사적 배경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보통 ‘···학’이라고 하면 ‘···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학문’을 뜻합니다. 그래서 ‘생물학’은 생물을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학문, ‘경제학’은 경제를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그 학문을 실행하는 주체는 연구자 즉 인간이 되고 그 대상은 연구자가 마음대로 관찰하고 실험할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연구자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그 대상을 분석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신학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릅니다.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은 인간과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해 연구를 할 때는 우선적으로 그분의 위대하심과 나의 작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즉 다른 학문과 달리 신학을 연구할 때는 그 근본적 자세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며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초대교회의 지도자들과 학자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신학’(神學)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했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도 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려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런 작업을 ‘신학’이라고 부를 경우 자칫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이라는 용어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또 우리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용어를 사용할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극히 존중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신학을 연구할 때 다루는 자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 즉 성경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비해 너무나 크고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지정의를 다 동원한다 해도 그분을 다 이해하고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의 일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작업을 신학작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신학작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기에 신학자는 하나님 앞에서 늘 마음을 낮추어야 하고 예배와 찬양과 기도의 경건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 훌륭한 신학체계를 만들었다 해도 그것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권위 아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아무리 빈틈이 없고 탁월한 신학체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불합리하게 보인다 해도 성경이 기준이 되어 신학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분리된 신학에 대한 반성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을 위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구체적인 상황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현장과 동떨어진 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다 보면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신학 자체만을 위한 신학이 형성되기 쉽습니다. 진정한 신학자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학자는 성도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영적 환경을 늘 염두에 두고 신학작업을 해야 합니다.

학문은 점점 세밀화, 전문화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의 신학은 대단히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작업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각 방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해 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학자들이 그것을 모른 척하고 내버려 두었다가는 조만간 큰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성도들에게 영적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지엽적이고 전문화된 분야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작업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멸시하거나, 혹은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이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이 선물 즉 이성을 멸시하거나 그것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곧 그것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됩니다. 물론 우리의 이성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보다 앞세우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 근거한 신학회복운동 실천

성도들이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추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선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해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고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지도 못할 것이고 힘을 다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성도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나가기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리서들은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교리 교육이 이루어졌을 때 성도들은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성도가 이단의 유혹이나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리는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올바른 교리교육을 받은 성도들은 쉽게 이단이나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건전하고 힘있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기독교 교리서들이 있지만 특히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알기 쉽게 잘 정리해 놓은 교리문답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들의 교리공부를 위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서를 추천합니다. 또한 그것을 더 알기 쉽게 풀이한 책으로서 『개혁주의생명신학으로 바라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강해』(장종현 저)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책을 교재로 삼아 공부를 한다면 성도들의 올바른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를 용납하여 하나 되는 것을 추구하는 회개용서운동입니다.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장이 거의 멈추어 있는 상태이고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한국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는 사회로부터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정통신학 혹은 개혁주의신학을 주장하는 교회일수록 서로 다툼이 많아 분열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생명력을 회복하여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

에베소교회(계 2:1-7)는 장점이 많은 교회였지만 교회의 본질인 사랑을 상실할 때 주님의 준엄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치관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이처럼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랑을 상실했을 때 주님은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주님은 교회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존재가치인 사랑을 상실할 때 적당하게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음성은 지금도 한국교회를 향하고 계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은 주후 1세기 에베소교회를 향해서도 그리고 21세기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한국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놓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십자가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시 7:1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 고난 속에서도 연단을 받았던 동방의 의인 욥은 회개하면서 신령한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복음은 회개에 대한 촉구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 다시 영적부흥기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87문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의 죄를 참되게 느낍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자기 죄를 슬퍼하고 미워합니다. 그리고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서며 새롭게 순종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지속적으로 힘써 순종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이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그토록 외치는 이유는 구속사는 회개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는 부흥은 모래 위에 세우는 집과 같습니다. 회개가 점점 사라지는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워져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답입니다. 한국교회 강단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외쳐야 합니다. 설교는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메시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회개가 없는 평안한 신앙생활로 교인들을 인도하는 설교자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갈 1:10). 회개가 사라진 교회에서는 십자가의 능력이 소멸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촛대가 끝내 떠나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한국교회 역시 에베소교회처럼 신학적 지식은 증대했지만 사랑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용서하는 신앙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용서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용서하는 삶을 살도록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주님은 서로 불만이 있지만 용납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그들의 모습 그대로 용납할 때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백석학원과 백석총회를 설립하고 38년을 지내는 동안 숱한 오해와 욕을 받아왔습니다. 그때마다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나의 자아를 죽이면서 가슴을 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내 겉사람은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지만 속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의 형상을 서서히 닮아갔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며칠 혹은 몇 달 심지어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하였습니다.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회개와 용서가 사라지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촛대가 떠나고 그의 영광도 땅에 떨어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왜 우리가 서로 친절하게 여기며 불쌍히 여기고 서로 사랑해야 할까요?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 근거한 회개용서운동 실천

가정에서 부모님의 간절한 소원은 자녀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친히 성부 하나님께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서로 자신이 월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은 권세와 명예를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가 없는 면류관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는 죽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높여주기를 바랬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한 그들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어떤 능력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런 한심한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막 16:15; 마 28:19-20). 민족복음화와 인류복음화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함께 힘을 합할 때 가능합니다.

한국교회는 중차대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국제정세는 변화무쌍하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위협은 증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통일한국을 바라보아야 하고 위대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한반도를 넘어서서 오대양 육대주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세계역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한 교회의 노력만으로도 안 됩니다. 한 교단의 수고만으로도 큰 역사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성경 해석과 강조하는 교리가 다소 다르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특별히 개혁주의신학을 가르치는 정통보수교회들은 교단의 벽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는 데 힘써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철저히 자신부터 회개하면서 서로 용서하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회개가 없는 교회, 용서가 없는 교회, 하나가 되지 못하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에베소교회처럼 책망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예수님의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덮을 수 없는 죄와 허물까지도 덮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습니다(롬 7:17-21).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처럼 희생하려고 해도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죄성이 녹아지도록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운동, 성령운동, 회개운동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살아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허사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살리는 영이 우리 속에 없기 때문에 세상에 집착하다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은 흙으로 된 것도 아니고, 흙에서 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의 숨결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자의 숨결 곧 하나님의 영과 교통할 때,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욥 32:8). 스스로 보수교단이라고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죽지 않고 겸손하지 못해서 우리 가운데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신학을 두고, 사랑과 교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교리’를 두고 나만 옳다고 고집을 피운 결과,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 한국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 되길 힘쓰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지키지 않으면서 ‘교리와 신학’만 고집하는 한국교회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1885년 복음을 들고 이 땅을 찾아온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장로교 목사였지만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님과 기쁨으로 사역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들의 협력은 교단보다 복음전파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결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 되지 못하고 갈라져 싸우고 비방하고 헐뜯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살아나려면 자기 것을 내려놓고 희생함으로써 연합을 위한 마중물이 되어야 합니다.

백석학원의 바탕은 개혁주의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앙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을 주창했습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개혁주의신학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넣는 실천운동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주님만 붙들고 산다면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상실하여 세상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만 바라볼 때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명예, 내 물질,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내 안에 살아있는 마지막 자존심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죽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예수님의 생명과 빛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 세상의 윤리나 도덕보다 더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님께 의지하여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무릎의 신앙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행하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공로가 되고 맙니다.

  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며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회복시키는 영적생명운동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기 전에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아무리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기독교에 대해 이론적으로 통달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이 아직도 죽은 상태에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이론의 전달이나 도덕적 감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영적 생명의 회복을 추구하는 영적생명운동입니다.

복음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외에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조금 자세히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꼭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셔야 했을까요? 어떤 훌륭한 사람이나 천사가 대신 죽었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우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자격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그런데 죄가 있는 자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어차피 자신도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는 어떨까요? 천사도 죄가 없는 존재이니 천사가 인간을 대신해 죽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어긋납니다. 어떤 왕이 ‘이 나무를 베어버리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그 왕의 아들이 나무를 베었습니다. 이제 왕의 아들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왕은 그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살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왕이 어떤 신하에게 ‘자네가 내 아들을 대신해서 죽어 주도록 하게’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왜 아무 상관없는 제삼자가 고통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만약 왕 자신이 ‘내가 아들을 대신해서 죽을테니 내 아들을 살려주게’라고 한다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는 멸망하리라고 법을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인간을 꼭 구해내고 싶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자들은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그렇다면 부활은 왜 필요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냥 육체는 세상에 남겨 놓으시고 영혼만 훌훌 하늘나라로 떠나가 버리셨어도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부활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성경은 아주 간단히 부활의 필요성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부활은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에 충분한 것이었을까요? 예,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해 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만약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에 부족한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계속 죽어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형벌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죄를 용서함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증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를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십자가가 우리를 죄를 완전히 깨끗이 씻어 주셨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셨고, 우리는 단지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이해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주의 백성이 지녀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

환자가 스스로를 고칠 수는 없습니다. 환자는 의사에게 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우리는 스스로를 치료할 능력이 없습니다. 윤리나 도덕을 배웠다고 해서 우리가 나아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야 비로소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변화는 우리의 내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과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성경은 복음을 받아들일 때 사람들의 삶 전체가 변화된 예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을 받아들인 후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는 영혼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 전체가 철저히 바뀐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도 그런 예들이 등장합니다. 변화를 받은 성도들은 물질에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4, 35).

또 헛된 세상 것을 좇던 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 지금까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들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행 19:18, 19).

한국교회에서도 이런 일은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가정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노름, 주색에 빠졌던 사람들, 백성을 정의롭게 다스리지 않고 부정부패를 일삼던 관리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바꾼 예들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생겨났습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 근거한 영적생명운동 실천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어서 빨리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5)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방법을 통하여 전도활동에 힘써야 합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거듭난 자임을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뚜렷한 영적 사건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자신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가 모두 뚜렷한 영적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분명히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곧 구원받은 사람이면서도 그 성령의 바람이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내게 불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내면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큰 은혜를 받아서 자극적인 경험과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해서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것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일입니다.

또한 이 확신이 있는 자들은 그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갖게 되도록 하기 위해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미국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운동을 통해 깨어났듯이, 영국이 웨슬리의 회개운동으로 새로워졌듯이, 또 한국이 20세기 초의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듯이, 이제 우리도 회개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마음을 낮추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회, 경제, 교육, 문화, 예술 등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을 실현하려는 하나님나라운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한 번 창조하시고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즉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시요 만유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왕으로서 통치하셔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는 하나님의 통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모든 영역에 있어서 마귀들이 그 곳을 침탈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타락과 부패가 곳곳에서 판을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죄의 세력을 이기셨고 이제 우리를 통해 모든 영역에 있어서 자신의 왕권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실현하려는 하나님나라운동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뜻

예수님의 메시지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천국)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참고, 눅 11:20).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분야에 있어서 왕이 되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죽어서 갈 천국과 영혼구원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분야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영혼구원과 교회의 확장에만 우리의 활동을 제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며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을 우리들의 좁은 울타리 속에 가두려 하는 어리석고 무엄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주(主)되심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골 3:1).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세상에 보내 주셨고,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을 통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는 대리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건 혹은 어떤 분야에서 일하게 하시건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 분야가 하나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들을 목사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세상 모든 분야에서 일하도록 만드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 지금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실현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 근거한 하나님나라운동 실천

이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모든 분야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대학이 있습니다. 대학은 사람들이 실제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그 준비를 하는 곳입니다. 학생이 대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는 확연히 달라지게 됩니다.

대학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대학에서는 다른 대학들과는 달리 모든 학문에 있어서 기독교세계관에 기초한 학문이 연구, 교육되어야 하고, 성경의 원리에 기초한 행정활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회적인 각종 이슈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자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분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는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세상 속에 있는 우리들이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중대한 직무유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의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 믿는 자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 주의할 것은 그 목소리를 내는 어떤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급이나 성별, 연령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출산장려운동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라는 말씀을, 그리고 남북한의 통일문제에 대하여는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7)라는 말씀을 설명해 주면 좋을 것입니다.

  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자신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실천을 추구하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킨 것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세상과 이웃을 위하여 나누고 섬기는 데 앞장서는 나눔운동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의 목적은 우리들만이 잘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영적, 물질적 축복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섬겨 주셨듯이 섬기는 자세로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소식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함께 나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나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나누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때 마치 나의 것을 나누어 주듯이 교만한 태도를 갖게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종의 자세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믿는 우리들에게 그분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우리가 받은 것들을 나누어 주되 예수님처럼 종의 자세로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본받아 철저히 낮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나를 낮추는 훈련을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종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을 섬길 수 있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이웃을 위한 성도의 섬김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삶을 살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산 모범적인 한국 기독교인으로서 장기려 박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의사가 된 동기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1950년 차남을 데리고 월남하여 1951년부터 부산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들을 거의 무료로 치료하였습니다. 평생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1975년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집 한 채가 없어서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 준 20여 평짜리 관사가 그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평생을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일관하였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 근거한 나눔운동 실천

우리가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는데도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아 그들이 지옥에 갔다면 그것은 진정한 나눔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하지만 이것은 봉사활동을 하기 전에 항상 복음부터 전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다른 모든 봉사활동은 나중에 있을 복음전도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의 직접적 전달 없이도 우리가 겸손히 섬기고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복음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가 항상 구제와 봉사를 매개로 삼아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교회의 모든 활동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을 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지혜롭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뜻을 받들어 전도뿐만 아니라 구제와 봉사활동에 적극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개혁주의생명신학이 지향하는 나눔운동입니다.

  1.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오직 성령만이 신앙운동, 신학회복운동, 회개용서운동, 영적생명운동, 하나님나라운동, 그리고 나눔운동을 가능하게 하심을 고백하며, 모든 일에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는 기도성령운동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기도와 성령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신학을 회복하고 영적인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뭔가를 해 보자는 운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무능함과 부패함을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인정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간절히 기도하면서 모든 일을 하고자 하는 성령운동입니다.

기도와 성령

주기도문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라는 주님의 명령과 함께 주어진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기도의 모범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드리면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 14).

하지만 기도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받기 위해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자 영혼의 호흡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 덕분에 그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 수 있고, 그 방법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늘 기도를 통해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려면 먼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어떤 에너지가 아니라 인격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 삼위이십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롬 8:9, 14; 고전 2:11 등) 혹은 예수(그리스도)의 영(행 16:7; 롬 8:9 등)이라고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기뻐하시고, 분노하시고,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을 비인격적인 어떤 에너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참 하면 마치 충전기에 꽂아 놓은 배터리에 에너지가 충전되듯이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차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도를 드리면 영적인 능력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인격체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더욱 강하게 역사하시게 되었기 때문이지 내게 어떤 에너지가 충만해진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인격체이심을 아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다음에도 항상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을 어떤 비인격적 에너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조금 능력이 생기면 그것을 자신의 욕심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인격체이심을 기억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운동과 성령운동의 목적

개혁주의생명신학에서 기도운동을 추진하는 이유는 기도가 없이는 우리가 너무나 쉽게 교만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사단,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해 주셔야 이길 수 있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늘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 하면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도 없을 뿐더러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싸움에 이겼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성과인 줄 알고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큰 어리석음이요 죄입니다. 우리는 늘 기도함으로써 겸손한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드리면 드릴수록 우리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우리의 자아가 더욱 작아지고 하나님께 대하여 순종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서 주인 역할을 하는 인격체가 두 개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아가 강해지면 성령의 역사는 줄어들고, 성령을 의지하면 나의 자아는 작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아가 깨어진 자를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자아가 깨어진 자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즐겨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허락해 주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세상 속에서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허락해 주셔야 할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축복 자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복은 우리가 늘 기도함을 통해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영으로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될 때, 필요에 따라 자연히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자들을 고난과 순교의 자리로 부르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자들만이 그런 고난과 죽음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통해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이지 세상적인 축복에만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령운동을 하는 목적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부패한 우리들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 일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그러므로 개혁주의생명신학에서 주창하는 성령운동은 우리의 부패와 무능을 고백하는 운동이요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심을 고백하는 운동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규칙들과 관습들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에게 순종하려 할 때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틀들을 내려놓고 그분의 역사하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자랑과 고집이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 근거한 기도성령운동 실천

개혁주의생명신학에서 주창하는 성령운동은 비성경적인 성령운동을 배격합니다. 비성경적인 성령운동이란 성령님을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삼위이신 분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비인격적 에너지로 취급하려는 운동을 말합니다. 그런 자세로 성령운동을 하는 이들은 마귀에게 이용당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자신을 쳐 복종시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초자연적 능력을 통해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잘못된 자세를 가지고 성령운동을 하는 자들은 손쉽게 마귀의 역사의 희생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를 배격하고 정적이고 지적인 신앙생활에 안주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악한 영들과의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며, 그것을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를 위한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예를 들면, 행 12:5이하). 한국교회는 열심히 기도하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 교회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됩니다. 기도의 열기가 식으면 교회는 위축되게 됩니다.

세계교회 역사가 그런 안타까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준 좋은 기도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생명신학에서는 새벽기도, 심야기도, 금식기도 등의 기도운동을 강조합니다. 기도만이 우리의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일곱 가지 실천운동으로서의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의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신앙운동, 신학회복운동, 회개용서운동, 영적생명운동, 하나님나라운동, 나눔운동, 그리고 기도성령운동 모두는 오늘날의 신학교와 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그 공통된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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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일자 : 2014.11.01